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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의고장 논산을 찾아서Ⅰ

8월 논산여행 예학의 고장 논산을 찾아서Ⅰ

기능위에 가치를 더하다, 돈암서원 꽃담장

담장은 기능의 가치로서도 그렇지만 그 가치를 넘어서 빼어난 조형성을 갖추기도 한다. 최고의 아름다움과 조형성을 지닌 담장은 단연 자경전의 꽃담장으로 꼽으며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특히 담장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자경전 십장생굴뚝은 보물 제810호로 지정될 만큼 그 조형성과 장식성이 빼어나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꽃 담장으로서의 조형미도 살려 조선시대 궁궐 굴뚝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자경전의 꽃담장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담장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예학의 산실 ‘돈암서원’에서도 그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서원의 내삼문 꽃담장이 그것. 담의 기초는 자연석으로, 나머지는 와편으로 장식한 이 담장은 조형성 짙은‘전서체’ 세 문장으로 꽃담장의 아름다움을 완결하고 있다. 여기에 새겨진 세 문장의 의미를 알고 나면 사계 김장생(1548~1631)의 학문과 삶이 느껴져 더욱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꽃담장에 새겨진 세 문장은 예학의 태두 사계 김장생의 실천적 학문과 그의 성품, 그가 바라는 세계관이 담겨있는 심오한 글귀이다.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고 본 그는 그것을 ‘예’라고 생각하며 ‘예론’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는 구봉 송익필(1534~1599)과 율곡 이이(1536~1584)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어받아 17세기 사림의 시대에 걸맞게 조선예학을 정비한 대가로 학문적 대성을 이루었다.

  •  돈암서원 전경. 이 서원은 사계 김장생이 타계한지 3년 후인 인조 12년(1634)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249번지에 창건 되었다. 효종 10년(1659) 사액 되었다. ‘돈암서원’은 서원이 있기 전부터 서원의 터가 되는 곳에 ‘돈암’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하여 이름이 유래한다.

    돈암서원 전경. 이 서원은 사계 김장생이 타계한지 3년 후인 인조 12년(1634)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249번지에 창건 되었다. 효종 10년(1659) 사액 되었다. ‘돈암서원’은 서원이 있기 전부터 서원의 터가 되는 곳에 ‘돈암’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하여 이름이 유래한다.

  • 돈암서원 내삼문과 꽃담장. 내삼문의 중앙문과 협문 사이의 담장에 전서체로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문장이 빨간 글씨로 눈에 띄게 새겨져있다.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한다.’는 의미로 김장생이 추구하던 학문의 세계를 글로써 표현하고 있다..

    돈암서원 내삼문과 꽃담장. 내삼문의 중앙문과 협문 사이의 담장에 전서체로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문장이 빨간 글씨로 눈에 띄게 새겨져있다.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한다.’는 의미로 김장생이 추구하던 학문의 세계를 글로써 표현하고 있다..

  • 내삼문의 꽃담장의 전서체 ‘화할 화’ 자가 새겨져있다. 내삼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오른쪽 담장에 새겨진 지부해함(地負海涵), ‘땅은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준다’는 의미의 이 문장은 성리학 중심의 당시 학풍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예를 바로 세우는 작업에 힘을 다하여 그의 학덕이 지부해함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하고, 왼쪽 담장의 서일화풍(瑞日和風), ‘상서로운 햇살, 부드러운 바람’을 의미하는 이 문장은 국가는 물론 백성들도 예를 배우고 행함으로서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김장생의 삶과 정신이 담겨져 있다.

    내삼문의 꽃담장의 전서체 ‘화할 화’ 자가 새겨져있다. 내삼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오른쪽 담장에 새겨진 지부해함(地負海涵), ‘땅은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준다’는 의미의 이 문장은 성리학 중심의 당시 학풍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예를 바로 세우는 작업에 힘을 다하여 그의 학덕이 지부해함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하고, 왼쪽 담장의 서일화풍(瑞日和風), ‘상서로운 햇살, 부드러운 바람’을 의미하는 이 문장은 국가는 물론 백성들도 예를 배우고 행함으로서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김장생의 삶과 정신이 담겨져 있다.

  • 돈암서원의 사당 숭례사 전경. 서원 창건시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였다. 효종 9년(1658) 신독재 김집을 추배하였고 이어 숙종 14년(1688)에 동춘당 송준길을, 숙종 21년(1695)에는 우암 송시열을 각각 추배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돈암서원의 사당 숭례사 전경. 서원 창건시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였다. 효종 9년(1658) 신독재 김집을 추배하였고 이어 숙종 14년(1688)에 동춘당 송준길을, 숙종 21년(1695)에는 우암 송시열을 각각 추배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주소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2번지

이용안내

  • 돈암서원은 문화유산해설사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현장에 상주하고 있어 답사여행의 편의를 돕고 있다. 단체의 경우 예약을 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예약문의는 해설사가 근무하는 시간 대에 돈암서원으로 전화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041-736-0096).

찾아가는길

네비게이션 이용 명칭 검색

  • 돈암서원,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2번지

자가용 이용

  • 자가용 이용: 호남고속도로 계룡나들목을 벗어나 사거리에서 직진 후 계속 직진하면 3.0KM 전방 길 우측에 홈플러스가 나온다. 이곳에서 계속 직진, 400M 사거리에서 우회전 후 다시 좌회전하여 1번국도를 이용한다. 논산방면으로 직진하면 11KM 전방 연산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논산방면으로 직진 후 3.4km 전방에서 좌회전하여 소로로 진입하면 목적지다.
조선예학의 태두 사계 김장생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소학>을 실천하기에 힘쓴 한훤당 김굉필, 그 제자인 조광조가 도학 . 성리학 . 의리학을 드높였으며, 회재 이언적과 화담 서경덕을 거쳐 퇴계 이황 . 율곡 이이는 조선 이학(理學)의 기반을 세웠다. 예학은 이러한 전통 위에서 그 정신을 이어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의 문인이었던 사계 김장생(1548-1631)과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인이었던 한강 정구(1543-1620)를 필두로 활발하게 전개하여, 정구의 영남(嶺南)예학과 김장생의 기호(畿湖)예학으로 발전하였다.

김장생이 조선예학에 기여한 점은 가례의 학문기반을 수립한 것이다. 그는 이학(理學) . 경학(經學) . 고증(考證)을 모두 겸하여 조선 예학의 기초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그 조(祖)로서 추앙 받고 있다. 이학과 경학을 통해 논거를 찾고 고금예서를 연구하여 미비점을 보완하고, 어려운 변례(變禮)문제에 대하여 제자 학우들과 문답하여 예를 실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저서중 대표적인「의례문해」는 관(冠) . 혼(婚) . 상(喪) . 제(祭)의 예(禮)에 관하여 매우 구체적인 문답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이 상례와 제례에 관한 문답 저술인「의례문해속」을 저술하는 기반이 되었다. 김장생은 예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였고, 일상적 생활이 예(禮)에 맞도록 실천하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독서의 순서로서 <소학>과 <가례>를 중시하였고, <가례집람>과 <의례문해>의 보완에 정성을 바쳤으며, 특히 변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상례비요>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그의 예학은 아들인 신독재 김집(1574-1656)을 통해 체계화되었고, 문인 우암 송시열(1607-1689),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초려 이유태(1607-1684), 시남 유계(1607-1664) 등을 통해 전승되었으며, 도암 이재(1680-1746)는 <사례편람>을 저술하여 예학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 사진5 돈암서원의 외삼문인 입덕문. 솟을삼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문 앞의 비는 오른쪽부터 ‘황강 정선생사적비명’, ‘헌성사림비’이다.

    사진5 돈암서원의 외삼문인 입덕문. 솟을삼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문 앞의 비는 오른쪽부터 ‘황강 정선생사적비명’, ‘헌성사림비’이다.

사계 김장생을 기리다 돈암서원

사적 제383호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각 지역의 사림들이 건립하였던 교육기관으로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강학하는 기능과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제향의 기능을 함께 갖춘 곳이다. 또한, 향촌을 교화하고 향촌에 바탕을 둔 공동체적 삶의 모델을 제시한 문화 계승 발전의 인문 환경의 모태였다.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건립한 뒤 위폐를 봉안하고 지내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현재의 연산면 임리 숲말에 소재하였는데 서원 서북쪽에 돈암이란 큰 바위가 있어서 서원의 이름을 돈암이라 했다. 고종 8년(1881)에 이르러 숲말의 서원이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조금 높은 지대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사우(祠宇),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로 호서는 물론 기호 전체에서 존숭 받는 서원으로서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이다.

  • 돈암서원의 사당 숭례사. 충청남도 지정 유형 문화재 제15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숭유사는 호서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 네분의 위폐를 모셔 제향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앞면에 한열은 퇴칸을 두는 전형적 양식이다.

    돈암서원의 사당 숭례사. 충청남도 지정 유형 문화재 제15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숭유사는 호서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 네분의 위폐를 모셔 제향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앞면에 한열은 퇴칸을 두는 전형적 양식이다.

  • 숭례사에서 바라본 돈암서원. 서원 사우들의 지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 뒤로 논산의 명찰 개태사를 품고 있는 천호산이 조망된다.

    숭례사에서 바라본 돈암서원. 서원 사우들의 지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 뒤로 논산의 명찰 개태사를 품고 있는 천호산이 조망된다.

  • 돈암서원 내삼문 앞마당. 양성각과 전사청, 장판각 등의 건물에 둘러싸인 이 마당은 아담하면서도 전통건축의 미가 풍기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돈암서원 내삼문 앞마당. 양성각과 전사청, 장판각 등의 건물에 둘러싸인 이 마당은 아담하면서도 전통건축의 미가 풍기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 돈암서원 양성당과 동재, 서재 전경. 양성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돈암서원 양성당과 동재, 서재 전경. 양성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 돈암서원 양성당. 사당 바로 앞에 있는 양성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전학후묘의 사우 배치를 보여준다.

    돈암서원 양성당. 사당 바로 앞에 있는 양성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전학후묘의 사우 배치를 보여준다.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돈암서원 원정비. 이 비는 돈암서원 양성당 앞에 위치하고 있다. 옥개형 이수를 올린 형태로 비신은 대리석이고 비좌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비석 몸체의 머리 부문에는 돌려가며 쓴 글자는 ‘연산 돈암서원의 비’라 되어있고 비문의 제목은 ‘연산현 돈암서원비기’이다. 돈암서원이 건립되면서 김장생, 김집 부자의 학문을 칭송하고 서원 건립과정 및 각 건물의 구조와 의의를 적은 비석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돈암서원 원정비. 이 비는 돈암서원 양성당 앞에 위치하고 있다. 옥개형 이수를 올린 형태로 비신은 대리석이고 비좌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비석 몸체의 머리 부문에는 돌려가며 쓴 글자는 ‘연산 돈암서원의 비’라 되어있고 비문의 제목은 ‘연산현 돈암서원비기’이다. 돈암서원이 건립되면서 김장생, 김집 부자의 학문을 칭송하고 서원 건립과정 및 각 건물의 구조와 의의를 적은 비석이다.

  • 돈암서원의 배롱나무. 수직사 앞에서 해마다 여름이면 붉은 꽃을 피우는 돈암서원의 홍일점이다.

    돈암서원의 배롱나무. 수직사 앞에서 해마다 여름이면 붉은 꽃을 피우는 돈암서원의 홍일점이다.

  • 정회당.

    정회당.

  • ‘정회’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하다는 뜻으로 김장생의 부친이 강학하던 건물이다. 대둔산자락의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이곳으로 이건했다.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뒷면 열 가운데 2칸은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을 두었다.

    ‘정회’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하다는 뜻으로 김장생의 부친이 강학하던 건물이다. 대둔산자락의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이곳으로 이건했다.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뒷면 열 가운데 2칸은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을 두었다.

  • 돈암서원 장판각 전경.

    돈암서원 장판각 전경.

  • 돈암서원 장판각 앞면. 돈암서원 장판각 안에 보존되어있는 책판은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 ‘가례집람‘, ’성례비요‘ 등이 보관되어오고 있다. 모두 4,168개의 책판이 있었으나 전란의 피해와 분실로 인새 현재는 2,103판만 보존되고 있다. 장판각은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우물마루를 깔고 책판 창고로 사용하도록 했다.

    돈암서원 장판각 앞면. 돈암서원 장판각 안에 보존되어있는 책판은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 ‘가례집람‘, ’성례비요‘ 등이 보관되어오고 있다. 모두 4,168개의 책판이 있었으나 전란의 피해와 분실로 인새 현재는 2,103판만 보존되고 있다. 장판각은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우물마루를 깔고 책판 창고로 사용하도록 했다.

  • 돈암서원 전사청. 전사청은 양성당 동쪽 옆면에 위치하고 있는 사우이다. ‘ㄱ’자 평면의 건물로 제향과 관련되어 제향 때 제물을 준비하고 제관들이 일을 보는 건물이다. 이 집은 유생들의 기숙사로 쓰이기도 했다.

    돈암서원 전사청. 전사청은 양성당 동쪽 옆면에 위치하고 있는 사우이다. ‘ㄱ’자 평면의 건물로 제향과 관련되어 제향 때 제물을 준비하고 제관들이 일을 보는 건물이다. 이 집은 유생들의 기숙사로 쓰이기도 했다.

  • 전사청은 반가의 안채구조를 하고 있다.

    전사청은 반가의 안채구조를 하고 있다.

  • 전사청의 창호에서 전통창호의 멋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바깥문은 띠살문으로 덧문은 아자살창으로 마무리하였다.

    전사청의 창호에서 전통창호의 멋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바깥문은 띠살문으로 덧문은 아자살창으로 마무리하였다.

  • 창호와 건물이 어우러져 멋스러운 전사청은 보면 볼수록 어느 반가의 고택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창호와 건물이 어우러져 멋스러운 전사청은 보면 볼수록 어느 반가의 고택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전사청의 덤벙주초와 댓돌.

    전사청의 덤벙주초와 댓돌.

보물 제1569호 돈암서원 응도당

응도당은 학문을 갈고 닦던 강당으로 서원 옛 터에 남아있던 것을 1971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다. 건물을 옮길 때 기와에 적힌 기록을 발견하면서 오래된 건물임을 알게되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회랑을 두른 듯 양 옆 풍판 아래로 눈썹지붕을 내어 독특한 전통건축의 멋을 풍기는 응도당은 조선 중기 이후 서원 성격 중 강당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갖추고 있다. 옛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 건물로 강당 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응도당 앞면.

    응도당 앞면.

  • 응도당 전경.

    응도당 전경.

  • 건축 규모가 큰 응도당은 보면 볼수록 전통건축의 아름다운 표정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측면에 눈썹지붕을 달아내어 그 무게를 지탱하기위해 세운 보주가 회랑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건축 규모가 큰 응도당은 보면 볼수록 전통건축의 아름다운 표정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측면에 눈썹지붕을 달아내어 그 무게를 지탱하기위해 세운 보주가 회랑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 눈썹지붕을 단 것은 측면에 창호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비바람이나 햇볕을 차단하기 위한 기능을 하기 위함이다.

    눈썹지붕을 단 것은 측면에 창호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비바람이나 햇볕을 차단하기 위한 기능을 하기 위함이다.

  • 응도당의 눈썹지붕.

    응도당의 눈썹지붕.

  • 응도당의 눈썹지붕.

    응도당의 눈썹지붕.

  • 응도당 대청에는 내삼문 꽃담의 세 문장이 액자에 걸려있다.

    응도당 대청에는 내삼문 꽃담의 세 문장이 액자에 걸려있다.

  • 응도당 근경

    응도당 근경

우) 32987 충청남도 논산시 시민로210번길 9 (내동) TEL.041-746-5114(민원콜센터 ☎1422-17, 무료) FAX. 041-746-5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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